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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야바위 | play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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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16, 2026
48:14

녹색 네온사인이 깨진 타일 위로 지직거리며 빛을 토해냈다. 과거엔 수영장이었다는 이곳은 이제 물 대신 눅눅한 어둠과 곰팡이, 그리고 싸구려 향수 냄새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젖은 트렌치코트를 털며 객석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의자는 붉은 벨벳이었는데, 손으로 쓸어보면 마치 짐승의 혀처럼 축축했다. 내 옆에는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떠는 일본인 노신사(그는 자신을 사토 교수라고 소개했다)와, 금니를 번쩍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국인 상인 장 씨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술을 보러 온 것 같지 않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러, 혹은 훔치러 온 눈치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길 잃은 영혼 여러분.” 무대 위로 조명이 쏟아졌다. 시리도록 창백한 녹색 빛이었다. 마술사, 미스터 르블랑이 나타났다. 그의 턱시도는 낡았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들은 무대 조명을 받아 기이할 정도로 번쩍였다. 그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매끄럽고, 너무 친절한. “오늘 밤, 우리는 아주 특별한 게임을 할 겁니다. 이른바 ‘영혼의 야바위’죠.” 무대 중앙에는 사람 키만한 거대한 캡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각각 녹색, 분홍색, 보라색 줄무늬가 그려진 캡슐이었다. 르블랑은 지원자를 찾았다. 망설임 없이 손을 든 건 맨 앞줄의 여자였다. 펑크족 차림에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엘레나라고 불린 러시아 여자였다. “사라지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르블랑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대로 해드립죠.” 엘레나가 녹색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캡슐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하고 울렸다. 그것은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재즈 피아노와 그루비한 드럼이 섞인, 듣기만 해도 멀미가 날 것 같은 곡이었다. 르블랑이 손을 휘젓자 캡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륵, 쿵. 스르륵, 쿵. 거대한 캡슐들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사토 교수는 수첩에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어 내려갔고, 장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트릭을 찾으려 애썼다. 나는 주머니 속의 박하사탕을 만지작거렸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기름 냄새.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 음악이 멈췄다. 캡슐 세 개가 나란히 섰다. “자, 우리의 어린 새는 어느 둥지에 있을까요?” 장 씨가 벌떡 일어났다. “가운데! 내가 봤어. 분명 가운데야!” 르블랑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확신하십니까?” “돈을 걸라면 걸 수도 있어!” 르블랑은 천천히 가운데 캡슐, 녹색 캡슐의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객석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장 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럼 오른쪽이다! 확률적으로 오른쪽이야!” 사토 교수가 외쳤다. 르블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오른쪽 보라색 캡슐을 열었다. 역시 비어 있었다. 남은 건 왼쪽, 분홍색 캡슐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꽂혔다. 엘레나는 저기 있어야 했다. 물리학의 법칙이 통하는 세상이라면. 르블랑이 분홍색 캡슐로 다가갔다. 그때, 나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르블랑의 표정.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잠깐.” 내가 말했다. 하지만 르블랑은 이미 문을 열어젖혔다.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캡슐 바닥에는 낡은 토끼 인형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쪽 귀가 뜯어진, 핑크색 토끼 인형. 정적. 빗소리만이 천장을 때렸다. “어디 갔어?” 장 씨가 소리쳤다. “여자가 어디로 간 거야?” 사람들이 무대 위로 웅성거리며 올라갔다. 캡슐 바닥을 두드리고, 뒤편의 커튼을 젖혔다. 비밀 통로는 없었다. 트랩 도어도 없었다. 엘레나는 정말로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혼란 속에서 무대를 등지고 객석을 바라보았다. 텅 빈 객석. 오직 한 자리만이 채워져 있었다. 구석진 자리, 공연 내내 미동도 하지 않던 ‘토끼 가면을 쓴 여자’. 그녀는 우리가 소란을 피우는 동안 조용히 일어나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 약간 절뚝이는 듯하면서도 가벼운 걸음. 엘레나가 무대 위로 올라갈 때와 똑같은 보폭이었다. 나는 그녀를 쫓으려 했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코끝으로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싸구려지만 달콤한, 엘레나의 향수 냄새였다. 토끼 가면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틈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녹색이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르블랑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실종된 엘레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극장은 폐쇄되었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주머니 속의 박하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화한 맛이 혀를 찔렀다. 엘레나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정말로 토끼 가면을 쓰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 토끼 인형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날 밤 그녀가 남긴 텅 빈 캡슐들은 마치 거대한 입처럼 입을 벌리고, 우리의 지루한 일상을 비웃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빗물에 젖은 전단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전단지 속의 문구가 네온사인을 받아 번들거렸다. ‘사라지고 싶은 자들을 위한 유일한 출구, 네온-베르데.’ - © All writing and music in this playlist are 추리플리 orig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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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야바위 | playlist | NatokHD